살며 사랑하며^^/슬픔과 고뇌 -영성

여기 날마다 되풀이 암송할 만한 주문(呪文)이 있다.

-검은배- 2009. 9. 28. 22:15

 

  여기 날마다 되풀이 암송할 만한 주문(呪文)이 있다.


  하느님의 생명이 내 안에 살아있다. 내 안에 살아있는 그 생명을 나는 안다.

  하느님의 생명이 내 안에 살아있다. 내 안에 살아있는 그 생명을 나는 안다.


  대답도 없다. 문제-해결도 없다. 알아차림(awareness)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이 주문을 욀 때마다 당신은 하느님에게 완전 포위된 몸이다.

  패트릭(아일랜드의 주보 성인- 가톨릭에선 바드리시오) 성인은 말한다.


  네 아래 하느님,

  네 앞에 하느님,

  네 뒤에 하느님,

  네 위에 하느님,

  네 안에 하느님.

 


  당신은 이 하느님을 획득(earn)할 수 없다. 이 하느님의 가치를 입증할 수도 없다. 그것은 오직 알아차림의 문제다. 그 알아차림을 즐기고 더 깊게 하는 문제다. 그것이 알아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한낱 티끌일 뿐인 내 몸과 내가 처해있는 이 순간에 그것을 보고 그것을 믿게 되면, 그러면 그 깨달음이 남들에게로 건너간다. 나 자신과 당신 그리고 다른 모든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신성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마침내, 모든 봄(the seeing)이 하나로 된다. 당신이 어떤 것을 어떻게 보느냐가 곧 다른 모든 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다.

 

 

  예수는 이것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당신은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자매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가? 그분은 최후심판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계명을 지켰느냐고, 교회에 출석했느냐고, 교황은 잘못하지 않는다는 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다만 제대로 보는지, 볼 수 있는지를 묻는다. 너는 지극히 작은 형제자매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느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중생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느냐? 그들은 냄새나고 더럽고 흉측하다. 그들은 복지시설에서 우리가 내는 세금을 갉아먹고 있다.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보인다면, 우리는 제대로 보는 것이다.

 

 

  예수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에게서조차 하느님의 신성한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분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결코 가르치지 못한 원수 사랑을 명한다. 인습적으로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영의 세계에서 통하는 말로 하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영의 세계에서는 전부 또는 아무것도 아님(all or nothing)이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든지,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일단 그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덫에 걸린 신세다. 한번 그것을 보면 원은 계속 밖으로 커진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에이즈 환자, 흑인, 깡패, 게이 또는 아무튼 같이 있기 싫은 누군가를 밀어낸다면, 우리는 그곳에 있는 게 아니다. 이 세계가 하나인 성전이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원수도 거룩한 존재인 것이다. 아웃사이더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과연 제대로 보는지를 알아보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그것은 원수든지 형제든지 인간존재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아가 개구리, 제비꽃, 갈대들한테까지 이어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황홀한 매력덩어리로 되는 것이다(Everything becomes enchanting). 한 하느님, 한 세계, 한 진실, 한 고통, 한 사랑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에 참여하는 것이 전부다.

 

 

  -Richard Rohr, Everything Belongs (The Crossroad Publishing Com. Ney York, 1999), pp. 50-52.

출처: 카페 主式會社 드림.  글쓴이: 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