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
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
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
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세상 창
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
어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
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루카 11,47-54)
우리 역사에서 보면,
우리는 수많은 예언자를 죽이고 박해 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충신, 열사들,
개혁가들이 죽었고 박해 당했음을 역사는 말 해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삶을 본받고, 그렇게 살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그들의 무덤은 아름답게 꾸미고... 그런 행위로 자신들의 잘못을 잊어
버리려 하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 예언자들과, 그 예언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시대의 예언자들은 무슨 말과 행동을 하였기에
죽임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은 것일까요?
그들은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푸는 삶이란 바로 [자비와 자선]의 삶을 말합니다.
자비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을 때 그것이 자선입니다.
자선은 자비의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는 분명 거슬리는 말과 행동들 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베풀고 하는 것은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과거에나 지금에나 대 예언자는 무리들의 밖에서 나옵니다.
교회도 역시나 밖에서 나옵니다.
교계제도권 밖에서 말입니다.
그런 예언자를 우리는 재야 예언자라 말합니다.
예언자는 사제들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농부였거나, 노동자거나, 그 시대의 비천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 속에서
나왔었음을 우리는 성경과 교회 역사 안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주교나 신부, 목사들에게서 예언자를 기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위기의 이 한반도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지만 이 시대에 재야에, 대 예언자가 한 분 계십니다.
누구냐고요?
김 대중 전 대통령이 바로 그입니다.
당신이 동의 하거나, 말거나~
우리나라 모든 이들이 신처럼 떠받들고,
거의 신앙의 경지에 까지 다다라 추앙하는 그 미국을 향해
칠십노구를 이끌고 매일 정의와 평화를,
광야에서, 대학 강단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늘 역사에서 그랬듯이 대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폄하하고 욕하고, 심지어는 박해하는 와중에, 외롭게 말입니다.
예언자의 외침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이 민족의 장래,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한반도의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통회 하여야할 것입니다.
이 민족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그를 통해 전해 주시는 하느님의 뜻,
그 시그널을 알아차리고 응답할 때에 우리의 내일이
좌우 될 것입니다.
미국이 우리 형제인 북한을 때리고, 괴롭힙니다.
미국의 따까리인 일본도 미국에 동조하여 우리 형제인 북한을 괴롭히고,
모욕하고 욕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에 동조하여 같이 때리고 윽박지를까요?
미국과 북한...누가 우리 형제요, 자매입니까?
우리가 도와야 할 대상은 분명 북한입니다.
예언자를 죽이고 박해한 조상을 욕하면서,
그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는 우리들이 명심해야할 것은,
이 시대의 예언자를 알아보고, 그의 외침에 귀 기울이며,
그를 통하여 전해 주시는 하느님의 메시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응답하는 일입니다.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분단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 용서하고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우선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고립된 북한을 돕는 일인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흘린 피의 댓가를 이 땅에서 지금 이 세대가
치르지 않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447항.
자선사업은 육체적으로나 영신적으로 궁핍한 이웃을 돕는 행위이다.
용서해 주고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내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가르치고,
충고하고, 격려 해 주는 행위는 영적인 자선 사업이다.
육체적인 자선 사업은 특히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집을 잃은
사람을 묵게 해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며, 병자와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보고, 죽은 이들을 장사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선은 형제애의 주요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이기도 하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먹을 것이
없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나누어 먹어야 한다.(루카 3,11)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 질 것이다.(루카 11,41)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은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고 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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