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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신앙, 돈과 교회, 돈과 성직자, 돈과 사목활동. 돈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는 세상 풍조다. 인간실존 자체가 돈으로 직결된다. “청빈, 가난은 큰 덕목이다.”란 성현들의 가르침은 골동품 같은 소리로 여긴다. 복음화 사업, 자선사업, 의식화 사업, 쇄신사업. 심지어는 정의구현운동도 돈 없이는 구체적인 징표를 창출하는 움직임을 조성하기 어렵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의도도 이런 인간실존현상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 같다.
오늘날 제도교회의 기득권층인 성직자들도 재물과 직결되는 복음사업의 심경을 표출하고 있다. 성당을 새로 건축하고, 가시적인 프로젝트를 실시하려면 꼭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주교는 헌금동원 능력이 있는 신부를 유능한 일꾼으로 여기고, 교구청에 공납금, 특별헌금을 많이 잘 내는 사제를 유능한 이로 여겨 특별인사 배치까지 한다.
헌금모금 운동에 유능한 사제가 자주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오늘 복음인 마르코 복음 10장 25절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코10,25) 이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당시 유대인들은 부의 축적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으나,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권력과 야합하면서 가난한 민중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식으로 불의하게 얻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부유한 이들의 관행에 쐐기를 박고 고발하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불의한 부의 축적은 하느님 나라와는 역행하는 것이고, 소유욕을 안고 사는 이는 결코 하느님 진리의 삶을 살 수 없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리고 신앙을 핑계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부를 축적하거나, 선량한 민중들의 귀한 재물을 모아드리는 행위를 철저히 거부하신 것이다.
가끔 성직자들이 수억의 거액을 복지기관이나 교구에 기부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는데 그런 결단을 내린 성직자에게 존경과 고마움의 정서를 느끼기보다는 어떻게 저런 거액의 돈을 축적할 수 있을까? 하는 상념을 안게 된다. “그래도 개인재산으로 여기지 않고 사회에 환원했으니 존경스럽다.”라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15년 간 정의, 평화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어느 중견 신부의 화두가 연상이 된다. “내 통장, 내 지갑에 백만원 이상 돈이 있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수억을 모을 수가 있나요. 그 방법이 무엇인가요?” 60년 간 사제생활을 마치고 선종하시기 전에 남기신 어느 존경하는 노사제의 충고가 뇌리에 스며든다. “사제는 물질적으로 가난할수록 영성적으로 풍요해지고 성장된다. 물질이 풍요하면 소외된 고통 받는 이웃에 무관심하게 되고, 기득권층만 바라보게 됩니다. 주머니가 비워질수록 축복으로 여기십시오.”
안승길(로베르토) 신부/ 원주교구 부론성당 주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