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엘리어트의 시가 아니어도 올 해 4월의 표정은 어둡다 못해
잔인하기만 합니다.
느티나무 소식지를 편집하고 편집자의 말을 쓰다가
이런 생각들로 어지러웠습니다.
정상적으로 출근해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한강 시민공원에 나와 잡초를 뽑는 서울시청 퇴출대상 공무원들의
빨간 목장갑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태 전 (내 나이 만 45세가 되었을 때) 사표 쓰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유로....”
(직장을 쫒겨 나면서도 내 일신상의 이유라니?)
아직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인 어린 두 아들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앞이 캄캄한 채, 그렇게 사랑했던, 누구보다 충실했던,
내 인생에서 마지막 직장을 잃었을 때가 말입니다.
직장에 죽을 죄 지은 것 없고, 어려운 시기, 어려운 직장을 위해 인내하고
모든 것 감수하며 열심히 일한 게 죄라면 죄랄까?
직장 내부의 사정에 따른 부조리의 일부로 구조조정을 빙자해 강요당한
일방 희생일 뿐인데, 일신상의 사유라고 사표를 쓰면서
어떤 광고카피를 떠올렸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한미 FTA타결로 온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이럴 때,
교회 어르신들께선 이 어지러움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주실까 하고
주교회의며 16개 교구의 홈페이지를 뒤져 보았습니다.
‘농민사목’을 사목지표로 한다는 ‘안동교구’에서 FTA에 대해
짤막한 성명을 내었을 뿐, 모두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다가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해결책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이 혼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교회의 입장, 가르침에 대해 참고사항 정도는 이야기할 수는 있었을텐데……
하긴 한마디 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부끄럽고 당혹스러웠던
기존의 경험들에 비춰 오히려 침묵을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요?
편집을 마칠 즈음,
미국 버지니아공대(VT)에서 총기 난사로 인한
대참사가 빚어졌습니다. 범인이 한국계 미국인(한국인이 아님)인 관계로
미국인들에게 미안하다는 추기경님의 추도사와 성명이 올랐더군요.
“특히, 이번 참사를 일으킨 젊은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저희 주교들은
더욱 큰 충격과 아픔을 느낍니다.”
생명의 존엄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재미교포가 미국이라는 주인집에 얹혀사는
손님 같은 존재가 아니라면 범인이 한국인이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조문사절 운운하며, 미국에 사죄하자는 이야기는 자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인들 스스로 밝혔듯이 미국 국내의 일이고,
미국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며 병폐인 것을,
우린 왜 미국 앞에만 서면 자꾸 작아지는 걸까요?
“한국인이라서 미안해요....(?)” 정말 오바이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