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슬픔과 고뇌 -영성

예수님의 성탄, 우리들의 성탄 [김인국 신부의 예수 이야기-1]

-검은배- 2009. 12. 21. 15:34

예수님의 성탄, 우리들의 성탄
[김인국 신부의 예수 이야기-1]
2009년 12월 21일 (월) 10:37:24 김인국 inkoook@hanmail.net

      우리는 지금 대림절 막바지를 지나고 있습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면서 교회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당분간 에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에 얽힌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 참에 청주교구
      금천동성당의 김인국 신부를 만나 '예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편집자   

 

 

 

 
▲ 아프리카의 구유장식(사진/고동주)

성탄이 임박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맘이 온통 예수님께 쏠려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일이 있어요. 예수님 때문에 아버지 하느님이 가려지는 일이 생기면 안 됩니다.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효자 중의 효자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에 대한 신앙보다 예수의 신앙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제자들이 들려주는 예수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느님 아버지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복음서를 보세요.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서는 별 말씀이 없잖아요. 오로지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 하느님,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이 더 중요해진 면이 없지 않아요.

성모님도 그렇잖아요. 겸손하신 성모님도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남기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경애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지어드렸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요. 자신을 비천한 종으로 여겼던 성모님인데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하고 크게 부르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아이고 부당한 일이라면서 손사래를 치지 않으시겠어요? 그런 이름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분별해서 사랑하고 공경해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뭐, 다 아시는 이야길 텐데 공연히 한 번 말씀드려 봤습니다.

대림절의 남은 시간이라도 우리 믿음 가운데 무엇이 근본인지 묻고 대답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구유의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며 큰 절을 올릴 것입니다. 장장 4천년을 고대하던 거룩한 아기께서 오셨으니 고맙기도 하고 황송하기도 해서 그럽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련하신 선물이 무엇이에요? 여러 가지겠지만 으뜸은 예수님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귀여운 어린이의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말씀으로, 아버지의 힘으로 오로지 아버지의 일만을 위해서 철두철미 헌신했던 그 신앙이 바로 예수님이 가져 오신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그런데 나는' 길'이라 하셨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요즘 말로 하면 나를 롤(role) 모델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김연아 선수의 어릴 적 롤 모델은 미국의 미쉘 콴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나를 모범으로 삼아 너희도 나처럼 살려므나 하신 거지요. 그런데 그저 "당신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아니 하느님 자체이십니다. 당신의 신성을 믿나이다" 하고 거기서 그치는 신앙생활이라면 곤란하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신앙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앙입니다. 그분이 성모님께 배웠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으며 십자가에서도 끝까지 간직했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신앙이 무엇이었는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예수님을 섬기는 법이요, 예수의 제자 노릇하는 길이며, 예수의 형제이며 벗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또 다른 예수가 되는 데까지 이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거지 괜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한 생을 거룩하게 사셔서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 못지않게 그리스도가 되어보자,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에요. 천오백년 전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기뻐하며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위엄을 차리고 기뻐 용약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 김인국 신부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들의 성탄 이야기"(사진/고동주)

예수님은 내려오는 길이 아니라, 올라가는 길

“너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역사의 위인이 누구니?” 하고 아이들에게 한 번 이렇게 물어보세요. 아니, 어른들에게도 물어보세요. “예수님이요!” 하는 소리가 잘 안 나와요. 왜 그럴까요? 신앙의 대상일지언정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예 제쳐놓는 것이지요. 강생하신 분이고 다시 저 높은 데로 올라가신 분이니까 그분이 나는 길이요, 했어도 그건 당신 말씀이고! 하는 식이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이 절대 경건의 인생이라고 여기고 옆으로 밀어둡니다. 우리같은 보통사람들이 닮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감동은 인간극장에 나오는 평범한 이웃들에게서 받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데 못난 인간이 되셨다는 점에서 동화처럼 아름다울 뿐 그 밖에 다른 것은 죄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했고, 희생했고, 용서했고, 너그러웠고, 믿음에 충실했고. 이렇게 예수님이 내려오는 길이 되었어요. 사실 예수님은 올라가는 길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사람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올라가는 길 말입니다.

불자는 뼈를 깎아 정진하는데, 우리는 편리한 은총에 안주

불교 같은 경우에는 자력구원이라고 해서, 저 스스로 길을 찾아야 되는데, 우리는 예수님이 그걸 다 찾아놨으니 이제 그걸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쪽에서는 각고의 정진을 통해 얻는 깨달음을 우리는 ‘은총’이라고 해서 아주 간단하게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해놨어요. 예수님이 분명히 한 것은 우리가 다시 태어나야 참사람이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우리도 우리 나름의 수행과 정진을 해야 하는 데 그것이 힘드니까 무상으로 주어지는 은총만 강조한단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공부 공부하는데, 우리는 도대체가 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요. 절접에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이미 얻었던 결론을 거듭 부정해가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식으로 공부를 멈추지 않는데 우리는 장장 1,500년 전의 교의언어만 반복하고 맙니다. 천오백 년 전이면 신라시대예요. 왕이 죽으면 남자와 여자를 각각 5명씩 순장(殉葬)시키던 때예요. 서양이나 우리나 사람의 생각이 아직 다 열리지 못했던 때입니다. 그 때가 논밭을 갈 때 소에 쟁기를 매서 끌게 하는 우경(牛耕)이 처음 시작되던 무렵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우리랑 매우 생소한 서양 형이상학 체계에서 만들어진 신앙언어를 별 고민도 없이 반복하면서 이의 없이 승복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여기면 종교가 자꾸 수준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종교는 본래 나의 문제인데 경배해야 할 하느님만 남고, ‘나’는 쑥 빠져버리니까 평생 성당을 다녀도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또 십자가 매단 집들이 그렇게 많아도 이 세상은 불의가 맘대로 판을 칩니다. 이야기가 참 오락가락했지요?

예수님은 천기를 누설하신 분

   
▲ 사제관에 걸린 십자고상(사진/고동주)
공연히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다시 예수님이 오신 뜻을 생각합시다. 예수님이나 우리나 갈 데가 없어서, 할 일이 없어서 그냥 여기에 온 게 아닙니다. 다 뜻이 있고 이룰 일이 있어서 온 겁니다. 저는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를 우리 각자의 이야기 혹은 사람이 걸어야 할 운명으로 읽었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의 탄생은 물론이고, 세상의 못난이들과 어울렸던 삶이며 십자가의 최후와 그 다음 부활과 승천까지, 성모승천도 마찬가지구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신약의 아담인 예수와 신약의 하와인 마리아 역시 우리들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 하면 예수 마리아만의 복음이 아니라 우리들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 부활이라고 대축일을 정해놓고 기뻐하는 것이지요. 우리 신앙의 목표는 예수님을 흠숭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거기까지 신앙의 목표를 둬야 됩니다. 그런 목표가 분명해야만 그래야만 이 세상도 착해지고 깨끗해집니다.

종교 없어도 별 다르지 않을 것...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심심찮게 종교 무용론이 나옵니다. 이 땅에 참 그리스도인은 예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말았다는 니체의 조롱을 기분 나쁘게만 들으면 안 됩니다. 반성해야지요.

모기가 없어지면 좋을 것 같지만, 생물학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모기가 사라지면 먹이 사슬이 끊어져서 오히려 무서운 병이 온다는 거죠. 반대로 이 세상에 인간만 없어지면 생태계의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모기만도 못해졌다는 말입니다. 종교가 번창하는 한반도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니 참 큰일입니다.

그럼 종교가 없는 세상은 어떠하겠습니까?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은 세상에 종교가 없어지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어요. “종교가 이렇게 많은 데 전쟁을 왜 못 막나?” 이렇게 물으셨단 말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성탄을 앞두고 다 같이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자, 제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여기서 줄입니다. 우리 서로 상대의 성탄을 축하합시다! 예수 성탄, 나의 성탄, 너의 성탄! 우리의 성탄

김인국 마르코(신부, 청주교구 금천동성당 주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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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흥겸(사진제공 나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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