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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숙 시인, 이해인 수녀, 양한모 선생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사진출처/이해인 수녀 홈페이지) |
오늘 한국교회는 평신도주일에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의 자랑스런 역사와 성직자 없이 40여 년 동안 홀로 신앙을 가꾸며 열매를 맺었던 역사의 소중함에 대해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각 본당에서 성직자 수도자들이 평신도들의 봉사에 깊이 감사하고 격려하고 칭송하는 행사를 하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는가? 주임신부님과 보좌신부님 그리고 수녀님에 이르기까지 본명축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축하하는 평신도들에게 평신도주일 정도에는 축하의 따뜻한 인사 한 마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평신도주일이라고 해서 본당 사목위원이 주일강론을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모든 본당에서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목위원의 주일 강론도 대부분 원고를 써서 읽어 내려가며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정도에 그친다. 본당사목에 대해 평신도로서 느끼는 소회와 성직자에 대한 바램과 평신도공동체의 성숙과 발전을 위한 깊이 있고 고뇌어린 충정을 쏟아내는 강론을 들어보기가 힘들다.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평신도주일만이라도 마치 이날을 200여 년 전의 그날처럼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 우리 본당을 되돌아보는 모습의 평신도주일 강론을 들어볼 수 있는 날이 과연 언제 올 것인가.
17년 전에 타계한 고 양한모 아우구스띠노는 한국교회의 평신도 상(像) 정립을 위해 혼신을 힘을 다한 분이다. 그는 ‘평신도’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신도’를 제창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모두가 ‘신도’라는 것이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모두 ‘신도’일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평’자를 붙인 것은 직분에 따른 구분인듯 하지만 사실은 서열에 따른 구분을 위한 것이라며, 위계질서를 강조하여 봉사가 아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설정으로 내몰게 되었으므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평신도’라는 용어가 ‘병신도’로 폄하되는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른다.
문제는 용어가 아니다. 참된 성찰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양한모 선생은 신도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했다. 50대 초반에 가톨릭신학대학에서 청강을 하고,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 신학서적을 탐독하며 신학적 성찰의 깊이를 더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특히 교세는 약하지만, 신학서적을 번역 소개하는 데는 부지런한 일본교회의 자료들을 첨단으로 받아들여 각종 강연을 통해 이를 소개했다. 1970년대 이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배우고 뿌리내리고자 했던 한국교회에 양한모 선생은 평신도 신학의 길을 여는 선구자였다. 오늘의 우리가 평신도주일을 다시금 음미하자면,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평신도신학이 어디에 와 있는지, 누가 평신도신학을 이끌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1974년에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신학대학에 벽돌로 지어진 옛 교사 대신 새 현대식 교사가 지어졌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신학생들로 연극반이 꾸려지면서 장장 2시간에 걸친 최초의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제목은 ‘삼종’ 즉 매일같이 우리가 바치는 삼종기도였다. 이 연극의 작가가 바로 뽈 끌로델이었고, 그는 평신도 신학자였다. 평신도 신학자의 작품을 대신학교 첫 무대에 올린 것이다. 신학적으로 얼마나 잘 해석해서 전달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지만, 그 후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평신도 신학자의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간직했던 기억이 새롭다. 양한모 선생이 계속해서 평신도 신학의 패러다임을 발전시키고, 뿌리를 내리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아쉽다.
<신도, 그는 누구인가? - 변진흥> 기사에서 발췌
세상에 외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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