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슬픔과 고뇌 -영성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검은배- 2009. 11. 9. 21:02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 인천교구 영성교육피정센터 건립 모금을 보고
2009년 11월 09일 (월) 10:18:53 호인수 hoinsoo@hanmail.net

작년 성탄절에 나는 서울강남성모병원 마당 한 구석에서 병원의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성탄미사를 드렸다. 그 소식이 <한겨레신문>에 사진과 함께 보도되자 나는 여기저기서 참 많은 말들을 들었다. 사제로서 할 일을 했다는 지지와 사제는 교회의 일원인데 이건 조직에 대한 반기라는 반대의 목소리다.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때 서울 땅에서 하필이면 인천교구 소속인 내가 미사를 하게 됐던 이유는 내게 무슨 노동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나 투철한 정의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미사를 드려줄 사제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애타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단순한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뿐이다.

오는 2011년은 인천교구 설정 50주년이 되는 해다. 추진위원회가 펼치는 다양한 기념사업들은 대개 새신앙운동, 새복음화운동 등 교세확장을 목표로 하는 타교구들과 엇비슷한데 그 가운데 핵심은 단연 '영성교육피정센터' 건립이다. '50주년 기념'을 거론할 때부터 우려했던 대로 집 짓는 일, 돈 걷는 일이 현실과제로 드러난 것이다. 9천 평의 대지에 3천5백 평의 건물을 짓는데 대략 3백억 원이 소요되니 한 세대당 평균 100만원~150만원을 봉헌하라는 '기금봉헌약정서'가 이미 주보와 함께 신자들에게 배부되었다. 나는 교구장의 모금운동 협조공문과 봉헌약정서를 앞에 놓고 오늘까지 고민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가) 지난 90년대 초에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는 인천대신학교 건립구상을 발표하고 사제들에게 솔직한 의견개진과 충분한 토론을 주문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격렬한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는 교구 사제 전원의 의사를 개별적으로 확인해서 찬성과 반대, 기권을 명시한 명단을 교구장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반대 의견이 반을 훨씬 넘었는데도 강화도에 학교 신축공사가 시작된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지만 여기에서 그 문제는 일단 유보하자.)

 

 

 

수백억 원이 드는 이번 50주년 기념사업 역시 결정, 공고하기 전에 필히 사제와 신자들의 중론을 들었어야 했다. 그게 순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과정이 완전히 생략됐다. (사제회의가 한두 번 소집됐지만 단지 통보의 장이었지 의견개진이나 토론의 장은 아니었다.) 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면 교구장은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끈질기게 사제와 신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 못 하면 포기해야 옳다. 그게 정도다. 그러나 오늘 인천교구는 그런 모습이 안 보인다.

나) 인천교구에 영성교육피정센터라는 '국내 최고 최상'의 건물이 왜 그토록 시급히 필요한가? 거기서 무슨 영성을 어떻게 교육할 것이며 피정할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서울의 최고급 호텔들도, 63빌딩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지만 나는 아직까지 가보지 못했다. 우리는 과연 그 건물 어디에서 하느님의 대자대비와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을까?

다) 공사비 3백억 원의 산출근거가 전혀 없다. 달랑 가상조감도 한 장이 다다. 완벽한 설계도를 놓고 공사를 해도 돈은 예상보다 늘 더 들게 마련이다. 일단 돈을 걷으면서 시작하고 공사의 추이를 보면서 모자라면 또 걷겠다는 배짱인가? 신자는 봉인가?

라) 청년실업자가 급증하고 사회의 양극화가 극심한 지금, 전용면적 17평 미만 주택에 사는 주민이 80%가 넘는 우리 동네 교우들에게 세대당 백만 원이 넘는 돈을 내라는 말을 나는 도저히 할 자신이 없다.

이래도 되나? 교구의 모든 사제는 교구장 주교에게 순명을 서약했다. 게다가 인사권자인 그에게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세상은 망조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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