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기쁨과 희망 -日常

기딩이 형

-검은배- 2006. 11. 20. 16:02

아름다운 동행(천사를 만나다)

 

어느날 문득, T.V에서 한 편의 공익성 광고를 보았습니다.

"공주 ㅇㅇ 초등학교에는 할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라는 카피와 함께 지팡이에 의지한 장애인 할아버지가 어린이들과 함께 활짝 웃는......
여러분도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어, 저이가 기동이형 같은데?" 곁에 계시던 어머니께서도 "그러네, 웃는 모습이 여전 기딩이네~" 이러시더군요.
기동이 형. 시골 어른들 발음대로 '기딩이'형!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일요일 우리 동네에 사시는 그분의 고모님께서 확인해 주셨으니까요.
"T.V에 나온 이가 기딩이형 맞지요?"
"얼레, 회장님도 봤네배? 왜 아녀유~" 그는 확실이 기딩이 형이었습니다.
고모를 통해서 어렵잖게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기억을 공유하는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직접 찾아가 보자고 의견 일치를 보는데는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와 팔순의 회장님의 동행은 시작되었습니다.

기동이 형,
청원군 남이면 비룡리에서 태어나 곧 심하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되었고, 가난한 살림에 남의 집 품팔이로 끼니를 해결하며 살림을 꾸리던 그의 모친은 여름 땡볕에 남의집 밭일을 하다가 주린 배를 채운 점심으로 토사곽란을 일으켜 죽고맙니다.
그 후 아버지는 새장가를 갔고, 들어 온 새 엄마란 사람이 다름아닌 심청전에 나오는 뺑덕 어멈이라~
그의 파란만장한 생은 또 다른 질곡에 빠져듭니다.
전실자식, 그것도 병신자식이라~ 어쩌면 가엾고 불쌍해서도 제대로 돌보련만 그 여인은 그러하질 못했답니다.
하여 그의 막내고모가 양육을 하게 되었고 타고난 심성이 착했던 기동이 형은 천덕꾸러기로 자라게 되었던거지요. 돼지키우는 집에서 불편한 몸으로 일을하고 얻는 얼마의 돈마저도 그 새어미의 장구경밑천이 되고 군것질거리가 되었다하니......
그러다가 그의 고모가 우리 동네로 시집을 오게 되었고 그때 그 불쌍한 조카를 데려 오게 됩니다. 하여 기동이 형과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기동이형은 우리 동네 방앗간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고 일요일이면 공소예절에 나와 어려운 발음으로 기도서며 성가를 따라했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는데도 한글을 다 꿰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오후 내내 우리집에서 나와 함께 놀다 가곤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그런 기동이형을 무척 잘 대해주었고 그도 우리 부모님을 잘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군대를 가게 되었고 곧 기딩이형은 잊어버렸습니다.
그 사이 나는 아버지를 여의었고 삶에 겨워 그의 존재를 잊은채 23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바보상자가 좋은 일을 한거지요.
그를 본 이상 만나야 했습니다.
왜냐면 나는 그에게 빚이 있었으니까요.
그를 잊은 채 나는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으니까요.

그리하여 추석을 앞둔 금요일에 길을 나섰습니다.
공주를 지나 대천 해수욕장 가는 길에 청양과 공주의 경계점에 놓인 삼거리(공수원)에서 우회전하여 약 4Km를 가면 최익현 선생을 모신 모덕사라는 사당이 나오고 게서 약 1Km를 더가면 오른쪽에 안당(안드레아)의 집이라는 조그만 안내판이 있고 그의 집이 그곳에 있습니다. 양로원 입구에......
집앞에 개울이 있는데 경치는 선유동이구요. 그 물이 모덕사 저수지에 모이는데 낚시를 드리우면 물 반 고기 반 일것같더군요.

그를 만났습니다.
"요한이지? 요한이~ 아이구 회장님도 오셨네~ 나 지금 꿈 꾸는거 아니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기딩이형이 한 말입니다.
한 시간 거리를 23년 걸려 그를 만났으니 나도 참 나쁜놈이었습니다.

기딩이형, 그의 23년은 이랬습니다.
우리동네 살던 고모네도 살림이 어려워 천안으로 돈 벌이 떠나고 기딩이형은 홀로 공주로 왔답니다. 20년을 하루같이 돼지키우는데서 일했답니다. 한 푼의 보수도 없이.
단 한 번의 외박이나 돼지 밥주는 일을 거름도 없이.
주일날 성당에 다녀오는 일 외엔 언제나......
그러다가 몇 해 전에 돼지 파동이 나서 사장이 파산을 했답니다.
그러자 사장은 기딩이형에게 그간 열심히 도와 준것을 고마와하며 망했다고 내가 너를 모른채 할 순 없다며 돼지막 있던 땅을 형 앞으로 돌려 주었고 형의 심성과 변치않음에 감화되어 온 가족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답니다.
기딩이 형은 그 땅을 공주성당 신부님과 상의하여 양로원 부지로 내어 놓았고 지금은 아담한 양로원이 되었습니다.
안당(안드레아)의 집... 그렇습니다.
형은 자신이 불편함에도 남을 위해 그 날도 노강댕이(노간주) 나무를 다듬고 있더군요. 지팡이를 만드는거죠. 그렇게 깎고 다듬고 식용유 메기고 니스칠 한 지팡이를 50개 70개씩 묶어 대전교구내 각 성당에 기증하였고 기딩이형의 지팡이는 충남의 노인들에겐 단연 인기 최고랍니다.
이제 그도 늙어 힘도 없고 불편한지라 인근 학교에서 양로원에 학생들이 봉사를 다녀가고 착한 심성으로 아이들을 무척 좋아한 형은 또 그 아이들을 손주처럼 사랑했고, 미담이 알려져 광고 모델이 되었고, 그리하여 나 또한 조금이나마 빚을 탕감케 되었던거지요.
받지 않을게 뻔 하기에 추석 떡값으로 받은 수표 한 장을 봉사자에게 주며 우리 떠난 뒤에 전해주라 부탁하곤 같이 공주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밥값 계산을 할 때 친정에미 배웅하는 딸네처럼 옥신각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도 회장님도, 또 기딩이 형도 점심값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부터 기딩이형과 잘 아시는 공주성당 신자인 식당 주인 자매님이 아무돈도 받지 않았으니까요. 멀리서 찾아온 귀한 손님들인데 받을 수 없다고....
그리고 기딩이형은 당신이 모셔다 드릴테니 우린 그냥 가시라고....

우리앞에 기딩이 형은 천사였습니다.
날개가 조금 상한,
사지육신 멀쩡한 내가 사실은 장애인이었습니다.
사회정의와 공동 선은 구두선 일 뿐, 나만 잘 먹고 잘 살았으니까요.

조치원 큰 도로변에서 만물 복숭아를 한 상자 샀습니다.
회장님댁에 그분을 내려드리며 복숭아를 전해 드렸습니다.

천사를 만나고 온 그 길은 정말 아름다운 동행이었습니다.
대천 해수욕장 가시는 길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모덕사에 들러 최익현 선생의 절개도 배우시고.
예의 광고에 나와 환하게 웃던 기딩이형을 만나 보세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아니랍니다.
촬영을 위해 분장을 했답니다.
더 늙어 보이도록요.
그이는 그게 불만이더군요.

한 번 천사를 만나보세요.
참 빼 놓을 뻔 했네요.
울 엄니 갖다 드리라고 기딩이형이 손수 따서 말린 영지버섯을 한 봉다리 얻어 온 사실을. 그는 천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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