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름 그륀 신부,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 한국진출 100주년 기념 초청강연
2009년 09월 21일 (월) 17:00:06 | 배은주 기자 ejb63@hanmail.net |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배은주)
“하느님을 통해 좀 더 건강해지려하고, 윤택한 삶을 살려하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는 식으로 하느님을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래로부터의 영성>, <삶의 기술> 등을 집필한 성 베네딕도회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의 말이다. 그는 20일, 서울 동성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예수의 산상설교로 알려진, 여덟 가지 행복선언은 성공적인 삶으로 가는 여덟 가지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신자들은 시작 전부터 강당을 가득 채웠고, 그륀 신부는 따뜻한 영성으로 신자들을 감싸 안았다.
그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한국진출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 신자들과 경제인 등을 대상으로 대중강연을 하고 있다.
여기에 안셀름 그륀 신부의 강연 중 ‘예수의 팔정도-복된 생활로 이르는 길 : 여덟 가지 행복선언의 실존적 해석’을 요약 정리하여 강연초를 싣는다.
예수의 팔정도(八正道)-복된 생활로 이르는 길 : 여덟 가지 행복선언의 실존적 해석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내가 아는 하느님은 너무나 크고 파악할 수 없는 분이다. 나는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도 적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이용하려 한다. 하느님을 통해 좀 더 건강해지려하고, 삶이 더 윤택해졌으면 하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하는 식으로 하느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놔두어라.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부나 재산에서부터 자유로운 내적 자세를 말한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놓쳐버린 것을 슬퍼해야만, 내가 지금 취한 것에 감사하며 살 수 있으며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고통을 뚫고 나가야 자신의 영혼과 만날 수 있다. 이겨내지 못하면 연민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된다.
행복하여라, 비폭력적인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자기 실수를 단죄하거나 고루하고 편협한 사람이 된다. 이런 편협함, 엄숙함의 근거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다. ‘비폭력적’이라는 말은 그리스말로 ‘온유함’이다. 독일어로는 ‘무엇을 모으다’를 뜻한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으고 허용함을 의미한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기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부만 떼어내어 인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실재를 만났다고 할 수 없다. 반쪽으로만 만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 부분만으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전적으로 만날 수 없다. 모든 것을 인정할 때 내 삶이 더 넓어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을 차지할 것이다.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배은주) |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네 번째 행복선언에 대해 4세기경의 한 교부는 예수께서 그리스철학을 완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의로움’이 모든 덕행의 근거라고 말했다.
의롭다는 것은 내 자신의 본질을 정당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무절제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완전하고 완벽하기를 바라고 언제나 성공하기 바란다. 자기만의 상을 가진 사람은 본질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에서 ‘우울함’은 자기 자신의 무절제함에 대해 영혼이 외치는 절규라고 한다.
올바르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의로움이다. 의로움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교육이나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불의하고 부당한 것에 정치적인 의로움으로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 사회의 의로운 구조를 위해, 정당한 분배와 기회균등, 정당한 임금 등을 위해 투신해야 한다. 성서는 의로움을 위해 씨 뿌리는 사람은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의 없이는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가정, 회사, 사회 전 세계에 적용된다. 내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도 얘기하고 있지만, 사회와 온 세계에 대한 참여도 말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자비를 위해 우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얻을 것이다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경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비가 필요하다. 그래야 다른 사람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성서에 자비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나온다. 히브리어로 자비는 ‘어머니의 자궁’을 말하는데, 엄마는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돌본다. 만약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롭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심리학에서 모든 사람 안에 ‘상처받은 아이’ 혹은 ‘버림받은 아이’가 있다고 말하는데, 종종 이 ‘상처받고 버림받은 아이’가 다른 사람을 상처주거나 버리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가 치유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자비롭다는 것은 상처받고 버림받은 아이를 따뜻하게 다루는 것이다. 잘 다루면 하느님같은 아이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롭듯이 너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비로운 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지 알게 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여섯 번째 행복선언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보는 존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스어의 하느님은 ‘바라보다’에서 왔다. 그리스인들은 피조물을, 인간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하느님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보는 것, 내 자신을 보는 것, 하느님을 보는 것, 모든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보는 것을 뜻한다.
독일어의 하느님은 ‘부르다’, ‘불려지다’에서 왔는데, 사람이 곤경에 처해서 구해달라고 하느님을 외칠 때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을 보는데 첫 번째 조건이다. 실수가 없거나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저의가 없는 것, 부수적인 의도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맑은 눈, 온 세상을 환히 비추는 깨끗한 눈에 대해 예수도 말씀하셨다. 반면 무엇인가 소유하려는 눈, 탐욕스러운 눈, 상처 주는 눈이 있다. 부수적인 의도가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깨끗한 눈을 본다. 노인들에게서도 평화로운 눈을 보게 된다.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한 내 말로 인해 깨끗하다.’고 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느끼도록 말한 것이다.
만약 도덕적인 설교로 많은 이들을 비난하게 되면 내가 더러운 사람이 아닐까, 더럽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불만이 있는 경우를 느낄 수 있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감정을 정화시켜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섞여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기도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순수함, 깨끗함, 티없음이 있다. 마리아는 하나의 상징이다. 구원된 사람이라는 상징이다. 동정마리아 탄신대축일에 읽는 에페소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씀이 있다. 낙관적인 표현이다. 우리의 단점과 잘못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내면의 맑고 순수한 핵심을 발견할 때, 자기 자신의 정체성, 신원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하면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순수함’이란 주제를 선호했고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연결했다. 그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말했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고 선사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 딸이라 불릴 것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스말로 평화는 ‘이레네’인데, ‘조화로운 음악’을 말한다.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불협화음 등 모든 음이 함께 울리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로 평화는 ‘샬롬’으로 ‘온전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평화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접합하는 것, 연결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평화는 ‘팍스’인데 ‘토의하다’, ‘상의하다’에서 왔다. 평화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화를 통해 다른 이들의 가치를 듣고 공통의 토대를 발견한다.
자기 안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만이 주변에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자기가 분열된 경우 주변 역시 분열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어떤 사제가 평화에 대해 말하면서 사제 본인은 일그러져 있다면, 그 공동체는 그렇게 분열되고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루고 다른 사람, 세상과 평화를 이루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여기에 깊은 지혜가 들어있다.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고통이나 어려움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적대적인 것도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다가가게 한다. 질병이나 불행, 좌절감 등도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게 된다.
그때 그곳에서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단죄,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완전함을 느끼고 어느 누구도 상처주지 못한다. 그곳에서 우리가 만들어 낸 상이 깨지고 비로소 본원적이며 진실하게 되며, 하느님 상이 드러나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순수하고 맑은 존재로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비가 머무는 그곳에서 집에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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